‘작다.’ Y에 대한 J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염색한 긴 갈색 머리가 굽이치며 허리께를 넘나들고, 흰 치마가 나풀거리는 것은 조금 뒤에야 눈에 들어왔다. J가 평소 그려왔던 이상형의 모습에 완벽했던 Y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무거운 가방을 지고 축 처진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녀가 친구에게 투덜거리는 목소리마저 귀여웠다. 그다지 높지...
아이의 눈물은 짭짤할까?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대려다, 이내 촉촉해진 엄지를 검지로 쓸어대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끈적거리는 촉감이 괜히 잊혀지지 않아 자꾸만 손을 꼼지락대는데, 아쉽게도 점점 느낌이 사라져간다. 저만치 뛰어간 아이의 뒷모습은 어느덧 노을에 삼켜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턱 아래로 내려간 얇은 마스크를 다시 코 위까지 끌어올리곤 숨을 크...
인간이 되면 이 텅 빈 것을 채울 수 있을까. 절벽에 위태롭게 서서 바위에 부서지는 새하얀 거품을 바라보던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연에 의해선 죽을 수도 없었다. 그저, 차가운 바람을 더 가까이서 맞이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그러지 마시오!" 그랬는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한 사내가 다급히 외치며 급히 ...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이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면 시커먼 속을 갉아먹어 종국엔 내 존재 자체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우습기도 하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떨리는 손은 멎으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옆에 놓인 총을 조용히 장전하고 네 머리에 가져다 댔다.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너는 그토록 끔찍해하던 서늘한 총구가 빛나고 있다...
"속보입니다. 지난 한 해동안 엽기적인 방법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했던 피의자가 검찰에 붙잡혔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조용하고 고요한 병실 안에서 단정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퍼진다. 아무말 없이 자그마한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침대 옆 협탁에 놓여있던 꽃병에 시선을 던졌다. 그가 가져다준 장미는 이미 말라비틀어진지 ...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에게 잡힌 손목이 시큰거린다. 암울하게 퍼지는 낮은 목소리가 온몸을 휘감았다. 소름이 돋았다. 잠깐이라도 그와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게 치가 떨렸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밤마다 그녀를 토닥였던 다정함이었고, 그의 얼굴은 활기를 건네주던 바깥의 빛이었다. 그는, 그녀의 전부였던 것이다. "너도 그...
햇빛에 찡그린 너의 눈은 그 색채가 부드럽고 온화했다. 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 홍채와 동공을 난 아직 기억한다. 손을 뻗어 태양을 가린 너는 그제야 편안하게 눈을 뜨며 싱긋 웃었다. 저 하늘에서 날아보고 싶다며. 감히 온전히 눈에 담기도 힘든 붉은 빛과, 새록새록 피어난 구름들과, 은은하게 빛나는 달과, 쏟아질 듯 내리는 별들. 지상과 존재부터가 다른 그것...
"이렇게 끝이야?" 머그컵에 맺힌 물방울이 탁자에 떨어졌다. 깊게 패인 나뭇결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입이 바짝 말라감을 느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컵에 손을 댔다가 축축한 불쾌감에 흠칫 놀라 다시 내려놓았다. 그게 다였다. 그녀는 그의 행동을 묵묵히 바라봤다. 아니, 그러려고 애썼다. 마음의 동요를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
안녕, 짧게 나에게 건네진 인사는 깊이 모를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았다. 잔잔했던 수면에 은은하게 퍼지는 파동. 아무도 찾지 않았던 버려진 호수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그 관심을 묵묵히 삼켜버렸다. 그러나 너는 계속 내게 다가왔다. 애써 무시하는 내게 지어준 그 미소는 내 마음에 쌓이고 쌓여 결국 파도가 되었다. 너라는 존재에 의해, 아...
날 보며 싱긋 웃은 그는 손에 든 조각칼을 툭 떨어트렸다. 차가운 대리석과 날카로운 금속이 만나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의 미소와 똑같았다. 나는 천사의 조각상이라도 마주한 듯,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뒤로 걸어갔다. "예뻐." 그는 얼굴에 담긴 표정을 지우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들어가있지 않은 그 목소리는 바람이 되어 내 볼을...
있는 힘껏 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하려고 노력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머리 위에 있는 황금빛 행복을 바라보며, 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내달렸다. 어느 순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뛸 듯이 기뻤음에도 그것을 표출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지금 멈추면 계단은 더욱 멀어질 것 같아서. 보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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